“한 해 동안 15,413명 자살,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 매일 42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는 나라”라는 언론 보도를 볼 때마다 충격을 넘어 이제는 무감각해진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단기간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세계에서 자살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 만해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가 8명 내외였는데 2009년 자살자가 31명으로 약 4배가 늘어났다. 자살이 급증한 것은 그만큼 살기가 힘들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성장으로 잘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살기가 더 힘들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이렇게 높아만 가는 갈까? 그 이유는 너무 다양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비중이 커지면서 인간은 점점 더 왜소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 활보하는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을 수단화 하고, 공동체 의식의 약화로 인해 발생하는 연대감의 단절은 인간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사막 한 가운데로 내버린 듯하다. 고통 속에서 “누가 거기 있습니까?”라고 소리쳐도 응답해 줄 사람이 없는 비정한 사회가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마틴 부버가 이야기 한 것처럼 ‘나와 너’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근원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는 ‘나와 그것’이 되어 언제든 필요 없으면 물건을 버리듯 버려지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사상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인류는 경쟁문명에서 공감문명으로 변화되어야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호모엠파티쿠스(homo-empathaticus)라는 개념을 만들어 공감하는 인간만이 새로운 미래,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하였다.
공감은 동료 인간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공감은 심리적인 영양소로서 신체적인 영양소와 함께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그렇기에 공감은 단절과 비정의 위기 속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다. 공감은 희망을 상실한 사람과 공동체의 마지막 생명줄이다. 생명의전화가 지난 35년 동안 생명줄이었던 것은 수많은 호모엠파티쿠스들을 통해 따뜻한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감을 해야 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영양소이다. 우리는 공감하므로 존재한다.



